"한강주."

 짤막한 부름에 소년에 가까운 남자가 피에 젖어 채 온전히 뜨지 못하는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본다. 소년과 달리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남자는 한참이나 소년의 젖은 눈을 응시한다. 피에 젖은 것인지, 눈물에 젖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눈이다. 남자는 소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저를 피하지 않는 시선 너머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다. 소년 본인조차도 모를 것이다. 지금 소년의 표정은, 그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이제 소년에게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복수도, 가족도…… 소년은 알고 있었을까. 복수의 끝에는 무저갱처럼 깊은 허망함만 남아있다는 사실을. 그 비밀을. 남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 남자는 지금 그 무저갱 바로 앞에 서있다. 그리고 무저갱에 스스로 몸을 던지고 끝없는 밑까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소년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이라면 끌어올릴 수 있다. 남자가 손을 내밀면, 지금은. 아직. 하지만 소년이 그 남자의 손을 잡을까. 어쩌면, 남은 것 하나 없는 인생에 이제는 미련조차 남지 않았다면. 하지만….

"일어나. 가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을 뻗은 남자의 손 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소년의 피로 얼룩진 얼굴에 비해 지나치게 깨끗한 제 손이 조금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당신이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못 해. 그러니까 당신은 살아. 만약 내가 죽더라도 당신은 살아야 해. 남자를 제 등 뒤에 두고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소년이 나직하게 중얼였었다. 그래. 그랬었다. 주인을 지키기 위해 맹렬하게 이를 드러내고 보이는 모든 것을 물어뜯는 사냥개의 눈빛을 한 소년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너의 주인일까. 그 언젠가, 조금은 까마득히 먼 어느 날 누군가는 이들을 미친개라 불렀다. 물어뜯고, 늘어지고, 숨통을 조이라고. 그 후에는 사냥 끝에 지친 사냥개들을 복날이라며 잡아먹으려 들기 바빴다. 그러나 남자는 달랐다. 남자는 그만큼 모질지 못했고, 그만큼 정이 없지 못했다. 남자는 상처입은 짐승을 두고 돌아설 만큼 매정치 못했다.

"……두고 가."

 소년의 목소리가 무겁다. 남자는 아무런 말도 않고 소년을 바라본다. 남자가 소년의 생각을 가장 잘 알고 있다 자신할 수 있는 이유는, 저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제 삶을 뒤흔든 판에 뛰어든 이래로 남자는 단 한 번도 멈춰선 적이 없다. 멈출 수 없으니 당연했다. 멈추면 뒤쳐졌고, 뒤쳐지는 순간 찔리고 밟힐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살기 위해 멈출 수 없었고, 복수와 신념을 위해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난 지금, 안도감과 뒤섞인 기묘한 허탈함이 남자를 떠나지 않고 어깨를 짓눌렀다. 정말 끝인가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제가 믿는 정의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낸 것에 벅차기도 했다. 아니, 기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지. 그리하여, 그러다가도 이제서야 우두커니 설 수 있음을 꺠달은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하지? 무엇을 해야 하지? 나는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 걸까? 하는, 그런 마음이 아가리를 벌리고 저를 덮치려 들어서. 제게도 그러한데 소년에게는 어떻겠는가. 아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깊은 것이 소년의 밑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소년 역시, 알고 있을 테지. 그렇기에 더욱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가자."

"……"

"…같이, 가자."

 남자는 묻고 싶었다. 네 기억 속에서, 같이, 라는 단어가 통용되던 순간은 언제였느냐고. 그 작고 어두운 방에서 홀로 지냈을, 누군가의 밑에서 대신 죄를 등에 업고 가슴에 주홍색 낙인을 단 채 한 평 남짓 음습한 방 안에서 창 밖만을 노려보았을 그 순간에도 홀로였을 너는. 알량한 동정심이라 해도 할 말은 없었다. 맞을지도 모르니까. 알량한 동정, 얄팍한 연민. 구차한 자기 위로. 너에게 손을 뻗음으로써 내 자신을 위로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한강주."

 지금 네 눈빛이 내게 말하고 있다.

 나를 데려가 줘.

 나를 어디로든 데려가 줘.

"나는, 사냥이 끝났으니 복날이라며 사냥개 잡아먹는 짓 같은 거, 안 합니다."

 때문에 남자는 부러 어설프게 웃어보인다. 등 뒤에서 보호받았다 하더라도 온전히 걸어나온 것은 아니었던 터라 터진 입가며 눈가가 쓰라렸다. 그러나 남자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버려진 개를 안심시켜 경계심을 풀기 위해 지어내는 억지 웃음과도 비슷해 웃음을 짓는 남자는 속으로 스스로를 비웃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여기서, 너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며 함께 가자 할 수는 없잖아. 나는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너와 함께,

 살고 싶으니까.

 남자의 눈시울이 일순 붉어진다. 눈가에 열이 오른다. 마음을 한 꺼풀씩 벗겨낼 수록 연약한 속내가 드러난다. 그래. 거창한 이유 모두 다 집어 치우고, 이제는 쉴 때가 됐다. 우리. 너무나도 가파르고 거친 길을 쉴 틈 없이 달리기만 했다. 이쯤 되면 우리도 음습한 이끼 천지에서 벗어나 햇볕을 쬐어도 되지 않을까. 너무 오래 빛을 받지 못해 양지를 잊어버린 너라면, 나라도 좋다면, 괜찮다면 내가 너를 이끌고 양지로 나가 두 다리 편히 쉴 수 있게 해줄테니까.

"한번 주운 개는 끝까지 책임져요. 난."

 그러니까 당신 내가 책임지겠다고. 차마 가다듬을 새도 없이 떨림을 가득 채워 나온 목소리에 소년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는 울 것 같은 눈을 한 주제에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다. 소년은 남자가 꼭, 제게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남자 본인에게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딱지가 내려앉은 입가에 시선이 닿으니 소리없는 탄식이 흘러나올 것 같다. 당신만큼은 완벽하게 지키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는 다르게 깨끗한 손을 차마 붙잡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미친개를 사냥개로 만들어 달려들 수 있도록 목줄을 풀어준 것이 그였다. 나를 미친 개새끼가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해 준 단 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다. 그런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나 누구의 목덜미든 물어뜯을 자신이 있다. 소년은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 코, 입, 부드런 입매와 가는 턱선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을 듯 눈에 담았다. 남자는 저와 같은 곳에서 달리기에는 너무 연약했다. 그러니까 내가 더 잘 지켜야 했는데.

"한번 쓰고 버려질 개 하지 말고, 앞으로도 내 등 지킬 사냥개. 그거 하자고, 너. 언제까지고 내가 길러줄 테니까."

"…비겁해. 당신."

 그런 말은 그렇게 쉽게 하는 게 아니야. 적어도 내 눈을 바라보면서 말할 거였으면.


 너,

살면서 나는…… 살면서 나는…… 그런 말 좀 하지 마 죽었으면서 / 김소연, 사랑과 희망의 거리


 살았어야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강주가 비틀이며 한 팔로 벽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눈 앞에 아무도 없는 현실은 여전히 어둡고 음습하다. 어설프게 웃어보이는 입매도, 눈물을 함뿍 머금고 있는 눈가도, 펜 잡을 법한 손가락에 잡힌 굳은 살을 제외하면 유난히도 길고 곧았던 손도 없다.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 노진평.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처음부터 당신은 내 것이 아니었고, 나는 그저 당신의 사냥개 중 하나였고, 어쩌면 당신은 나를 그저 한 마리의 미친개로만 봤을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당신을. 나는. 흐, 바람 빠지듯 헛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킨 강주가 벽을 더듬거려 피묻은 야구 배트를 손에 쥐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나의 달음박질도, 당신의 유지遺志도.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나는 계속 달려야만 한다. 무릎이 꺾이고 발이 죄 찢어져도 나는 달려야만 할 것이다. 

 노진평.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었잖아. 그냥, 사냥개와 목줄을 틀어쥔 주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잖아요. 그렇지?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지켰던 그 모습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가세요. 이제 목줄 틀어쥘 주인을 잃은 사냥개가 날뛸 차례다. 그러니까 더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그냥, 그냥. 내가 또다시 모든 것을, 정말로 모든 것을 다 끝냈을 때, 아니면, 내가 가쁜 숨을 거둘 때… 그때 내 앞에 나타나요. 그때 다시 내 목줄 틀어쥐고, 억지 웃음이라도 좋으니 웃으면서, 나를 어디로든 데려가 줘.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갈테니. 어디든 당신 뒤에 서서 당신을 지킬 테니. 내가 처음부터 배운 것이 그것이었으니 마지막까지도 그러할 수 있도록.

 그러니까 나를 두고 가.

 당신의 끝을 내가 마무리지을 때까지.






'나쁜 녀석들: 악의 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후진평 / 그 남자의 출근길  (0) 2017.12.21



그 남자의 출근길

허일후 x 노진평

준희



 노진평, 그 남자.

 전 서울지검 소속, 현 서원지검 소속 평검사. 그리고… 우제문 부장검사 밑에서 팔자에도 없는 동분서주를 하느라 하루하루가 고된 대한민국의 소시민 중 하나. 아무리 인생이 제멋대로 흘러간다지만 기획통하고는 너무 거리가 멀지 않나. 그것도 그런 상사 밑에서. 번듯한 사무실도 아니고 20분에 한 번씩 지하철이 지나가는 열악한 근무 환경까지… 뭐, 이렇게 불평을 하는 이유는 그저 지금이 아침 출근길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듯, 진평 역시 클래식 음악을 배경으로 깔고 상사와 제 처지 욕을 하며 졸음을 어떻게든 몰아내고 있었다.

 안그래도 매일이 고단한데 지옥철 안에서 앉지도 못하고 사람들 사이에 끼어 가느니 일찍 일어나겠다 싶은 마음에 아침잠을 줄여가며 일찍 나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역 두어 개를 지나니 들어오는 사람들이 저마다 머리와 옷을 털며 들어오는 것을 보아하니 눈이 오는 게 분명했다. 워낙 변덕스러운 날씨니 아침에 싸리눈이 내리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지만, 역을 조금 더 지나쳐도 들어오는 사람들의 볼이 발갛게 언 것을 보니 제법 눈이 많이 내리는 모양이었다. 아, 이건 좀 큰일인데. 우산도 없고… 역에서 내려도 사무실까지는 조금 걸어야 하는데. 역세권이면 뭐하나, 지하철하고만 드럽게 가깝지. 그 사무실. 차라리 서원지검이었다면 첫 출근 날처럼 택시라도 타지. 애매하게 가까우니 택시를 타기도 아까운 거리다. 하여간 수사관님 참….

 그래. 아무튼, 눈이 온다. 정말 겨울은 겨울이다. 진평은 지상으로 올라온 지하철의 바깥 모습을 바라보며 그제서야 겨울을 실감했다. 지상에 위치한 역인지라 역사에 눈이 쌓이진 않아도 내리는 눈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거 참, 예쁘게도 내린다. 바람 한 점 없이 하늘이며 내리는 눈송이가 육안으로 확인하기에도 제법 굵다. 이정도면 정오까지는 내리려나. 사무실 사람들, 귀찮다고 짜장면 시켜먹기 일쑤인데 배달 시키기도 미안하려나, 물론 그 사람들은 그런 거 신경도 안 쓰겠지만, 하는 생각들을 하니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지듯 소리없는 웃음이 흘러나온다. 진평은 고개를 돌려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 인간들이 어느새 익숙해졌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말이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해도 어, 왔냐, 하고 대충 답하는 하는 직속 상관이 있고, 인사는커녕 꼬나보지 말라며 승질만 안 내도 다행인 또라이 형사가 있고, 가장 어린데 귀염성도 없고 오히려 같이 있으면 무섭기까지 한 놈이 하나 있고… 취소. 하나도 안 익숙해졌다. 생각하니 더 출근하기 싫어져 진평은 쿵, 철제 봉에 머리를 박았다. 인생이 참 험난하다. 출근하기 싫다.

 서늘한 봉에 이마를 대니 그나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아 눈을 꿈벅인 진평이 문득, 나머지 하나를 떠올렸다.

 "… 커피 마시고 싶다."

 그 남자의 커피, 별 것도 아닌. 그게 뭐라고 지금 갑자기 생각이 날까. 


허일후, 그 남자.

 전 동방파 간부, 그리고 지금은 이름도 없는 인남동의 어느 변두리 식당 주인. 일명 허사장. 김치찌개가 제법 맛있는 곳. 사무실로 출근하기 전 2층의 제 집에서 내려와 가게 안을 살핀 일후가 문득 (새로 설치한) 유리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침 해가 그리 밝지 않다 생각했는데 역시나,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송이를 보아하니 꽤 굵은 것이 제가 사무실에 갔다가 돌아오면 꽤 쌓여 있을 것 같은데, 가서 하는 일이 제법 거칠게 몸을 쓰는 일이라 가게 앞 눈을 쓰는 게 귀찮은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잠시 유리문을 열고 바닥에 던져진 오늘자 신문을 집어든 일후가 눈 위에 얇게 쌓인 눈을 탁탁, 털어내고 의자를 끌어와 눈 내리는 모습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따금 주방 너머에서 작게 울리는 달그락, 하는 소리 이외에는 눈 쌓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었으나 일후는 그 정적을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 그의 삶이 지금까지 난장판과 비명의 연속이었으므로.

 신문을 보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그가 동방파에 몸을 담고 어느정도 조직원들의 인사를 받는 위치에 올라왔을 때부터 생긴 버릇이었다. 그의 전 오야의 버릇이기도 했다. 형님. 우리 같은 놈들이 아침마다 신문 꼬박 읽어 뭐 합니까. 형님도 참 성실하십니다. 하며 웃자 그는 신문을 곱게 접어 내려놓으며 일후에게 답했다. 

- 일후야. 그런 생각을 하면, 아무리 너 몸 담은 곳이 큰 물이래도 너는 그 안에서 삼류밖에 안 되는 거다. 주먹 휘두르면서도 존경 받고 싶으면, 힘들다고 불평 말고 뭐라도 머리에 집어넣어. 어쩌다 이곳 흘러들어왔다만 너도 입 다물고 그리 차려입고 있으면 주먹 쓰는 놈이라는 거 알기 힘들 정도로 말쑥하니, 책 읽고 신문 읽어 머리도 키워라. 이제. 몸은 적당히 키웠잖냐. 그렇지? 그게 네가 주먹 쓰는 놈이라고 돈 많은 놈들한테 무시받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날부터 일후 역시 오야를 따라 눈에 들어오지 않는 신문을 읽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바스락이는 것은 종이고 촘촘한 것은 글자다 싶던 신문의 내용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글자를 머리에 담는 것이 익숙해지니 세상이 보였고, 세상이 보이니 생각이 깊어졌다. 주먹부터 휘두르던 천성도 어느새 고쳐졌다. 아주 시간이 흐른 어느 날엔가 오야가 그리 말했다. 봐라, 넌 터를 여기에 잡긴 했어도 제법 쓸만한 놈이었다.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괜찮거든. 하고. 1면부터 차근히 살피며 기사를 눈에 담던 일후가 문득 아주 먼 언젠가를 떠올리고 픽 웃었다. 그렇게 몸에 밴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형님은 제가 이렇게 될 것까지 보이셨습니까. 묻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럴 수 없으니 그저 신문을 접고 다시 밖을 바라보는 수밖에.

 그러다 문득, 그가 떠올랐다.

"역에서 사무실까지 좀 걸어야 할텐데…"

 그 남자. 말쑥하고, 가늘고,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검사. 노진평. 지금은 이래저래 익숙해진 것 같다만 처음에는 얼떨떨하니 끌려다니기만 하다 쨍하니 소리를 지르는 게 제법 성깔 있는 놈이다 싶었다. 물론 성깔만 있고, 펜대만 잡은 사람이라 주먹 못 쓰는 건 당연하고. 그래도 험한 사람들 속에서 꽤 심지 굳게 자기 자리 지키는 걸 보니 그 역시 우제문의 말대로 사연이 좋거나 쌓인 게 많거나 할 듯 싶었다. 물론 그의 사정은 안다. 창준이형, 창준이형, 몇 번인가 말했으니. 그 전의 이야기도 알고. 하지만 전해들은 것과 직접 듣는 것, 그리고 직접 경험하는 것은 크게 다르므로 제가 그 사연의 좋고 나쁨을 감히 결정할 수는 없을 테다. 그저, 이제는 거친 현장과 사무실 출근이 익숙해진 듯 해 보이는 그 검사에게 저 나름 친절하게 대해줄 뿐.

 때문에 지금 눈 내리는 모습을 보니 진평이 떠오른다. 우리 중 유일하게 정장을 갖춰 출근하는 사람인데, 우산은 챙겼으려나. 그 사람 보아하니 차도 없는 것 같고. (막 전입한 평검사니 더 그럴 것이다, 아마.) 시간을 확인한 일후가 몇 장 읽지 못한 신문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은 출근 전에 식당 앞을 좀 쓸어두고 가려고 했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겠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할 일이 있으니. 



 그리고, 지금.

 "…허사장님?"

 사박하니 곱고 굵은 눈이 하늘이며 내려오는 인중역 계단 앞, 마주친 두 남자.

 인중역 계단을 올라오니 역시나 함박눈이 내리고 있어서 긴 한숨을 내쉰 진평이 가죽 가방을 차마 머리에 쓰고 갈 순 없어 누가 두고 간 신문이나 남은 일간지라도 없을지 주변을 살피던 참이었다. 구시가지인지라 인중역에는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별로 없다 보니, 안그래도 신문이 귀한 시기에 어쩌면 당연하다는 듯 신문은커녕 종이 쪼가리조차 보이지 않아 절망하며 사무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침 사무실 가는 길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우산을 안 가져오셨을 것 같아서."

 우연히 사무실 사람을 만난대도 신 수사관님이나 부장님일 줄 알았지, 저 사람일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하지 못했던 듯 진평이 눈을 둥글게 뜬 채 한참이나 제 앞에 선 일후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반응도 예상했다는 듯 일후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지만, 여즉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진평은 그저 눈을 꿈벅이기만 할 뿐이다. 이 사람 참, 놀라는 모습이 한결같은데 이상하게 질리지가 않는다. 속으로 좀 더 웃던 일후가 어깨를 으쓱이며 제가 쓰고 있던 우산을 흔들었다. 안 가십니까? 사무실. 하며.

 "예?"

 "출근은 하셔야죠."

 "아뇨. 그게 아니고. 우산"

 이런 말 하긴 정말 죄송한데, 우산… 하나만 가져오셨습니까? 하는 머쓱한 물음에는 제법 뻔뻔하게 고개를 기울여 보인다. 혼자 살다 보니, 우산도 하나면 충분해서. 그래서 눈 다 맞고 사무실 들어가실 겁니까? 수트 아깝게. 쪽팔려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색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묘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조금 더 짓궂어지는 기분이라 일후는 잠시 긴 숨을 내쉬었다. 어설프게 친한 사이에 괜히 놀려서 뭐 하자고. 사실 우산이 하나 뿐인 것도 맞다. 혼자 사는 집에 어디서 선물 받지 않는 이상 우산을 또 살리가 없지 않은가. 더구나 저같은 사람은. 물론, 차가 있어 우산 쓸 일이 별로 없었지만… 제 차는 사무실 근처 공용 주차장에 얌전히 주차되어 있고, 이 사실은 진평이 알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애초에 그걸 물어볼 생각도 못하는 것 같고, 지금은.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제법 큰 검정 장우산 아래에 둘이 나란히 서 사무실을 향해 걷고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물론 나름대로 역세권이라고 몇 분 걸으니 바로 당구공 스티커 크게 붙은 건물 입구가 보인다. 제문과 성철, 필순이 (성철은 좀 의외지만) 거의 사무실 문을 여는 편이니 들어가면 셋 중 하나는 먼저 앉아 TV를 보고 있을 터였다. 곤란한가? 사실 일후에게는 아니었으나 진평은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후는 시선을 슬쩍 돌려 진평을 바라보았다. 찬 공기에 의해 조금 붉게 물든 뺨. 이제 거의 희미하게 흔적만 남은 뺨과 턱의 상처. 그래, 기획통 꿈꾸던 검사님에게는 안 어울리는 상처이긴 했지. 그러나 발간 뺨이나 숨 쉴 때마다 희게 흩어지는 입김 같은 것은…… 그가 검사여서가 아니라, 그냥, 괜히 어울리는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단 일후가 다시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주 잘 맞물리는 톱니바퀴처럼 진평이 일후를 바라본다. 다부진 옆선이지만 단지 그뿐이지, 그렇게 주먹을 쓰는 사람일 줄은 몰랐었다. 지금에야 그가 현장에서 주먹 휘두르는 것을 보고 또 봤으니 자연스럽게 연상이 되지만 처음엔 정말 그랬다. 이런 사람을 보고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단 말이지, 내가. 헛웃음이 날 것 같은 기분에 진평이 입꼬리만 희미하게 올린 채 그를 조금 더 바라보며 걸었다. 진평은 문득 그가 궁금해졌다. 개괄적인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싶은 것은 조금 더 다른,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주먹 쓰는 사람답지 않은 다정한 말투? 여유가 있을 때마다 신문을 보는 곧은 등? 그도 아니면, 커피를 내리고 타는 손길? 아. 그러고 보니, 커피. 아까 지하철 역에서도 갑자기 그게 생각이 났었지. 진평이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향했다. 어느새 사무실 건물 앞이다. 

 너나할 것 없이 입구에 멈춰선 둘이 잠시 서로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진평의 시선은 조금 어설프게 아래로 치우쳐 있고, 일후의 시선은 그런 진평의 얼굴로 곧게 향해 있다. 참 예상이 간다. 이 남자는. 시선까지도. 어깨를 으쓱인 일후가 입구를 고갯짓했다. 보아하니 어색해 어쩔 줄 몰랐을 거다. 같이 들어가면 더 질겁하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검사님, 혹시 불편하면 먼저…"

 "들어가면 커피 좀, 타주세요."

 "네?"

 허사장님 커피, 꽤… 맛있더라구요. 그러니까. 그럼 저 먼저 들어갑니다. 다급히 뒷말을 덧붙이고 우산 아래에서 얼른 나와 사무실 계단으로 달려 올라가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기만 했다. 검은 장우산에서는 사박이며 눈 내려앉는 소리가 울리고, 희미하게나마 계단 달려 올라가는 소리가 울린다. 발을 헛딛기라도 했는지 악, 씨! 하고 소리치는 것도. 허… 참. 생각보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사람이었네, 저 검사님이. 찬 공기에 흰 입김을 내쉬며 잠시 너털웃음을 지어보인 일후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우산을 접었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사람이고,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도 있고. 곱게 눈이 내리기에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었지만 아무래도 지하철 역 마중을 나가 보길 잘했다 싶고.

 그러니, 당분간은 가게에서 나서는 시간을 좀 당겨도 괜찮겠다.


'나쁜 녀석들: 악의 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주진평 / 사냥개가 우는 밤  (0) 2018.01.07
/